엄마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주말에 부지런을 떨며 일찍 일어나, 근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 할 일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시간. 요즘은 날이 더워져 실내로 들어가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그 카페에 간다. 물론, 할 일을 하는 시간은 잠시이고 주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거의 내가 말하고 엄마가 들어주면서 한 번씩 생각을 말해주는 형태이긴 하다. 이야기의 주제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요즘은 내가 졸업에 가까워지고 있다 보니, 주로 졸업 후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늘 공통적으로 가정하는 전제가 있다.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의 말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가 어느 정도 포용적 제도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애쓰모글루 교수는 이 책에서 불평등의 원인으로의 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우선 포용적 제도착취적 제도라는 제도의 양 극단을 설정하고 있다. 먼저 그가 말하는 포용적 제도는, 경제제도의 측면에서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법체계가 공평하게 적용되어 경쟁 환경이 공정하며,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경제제도는 곧 개인의 측면에서 포용적 시장을 만든다. 그는 포용적 시장개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과 소명을 추구할 자유를 가지게 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나와 엄마의 대화 속 전제와 통하는 지점인 것이다. 이런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와 순환의 관계에 있는데, 여기에서 포용적 정치제도는 적당히 중앙집권화되고, 적당히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의미한다. , 어느 정도 통용되는 질서가 있으면서, 권력 또한 어느 정도 분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 그가 설정한 다른 극단인 착취적 정치제도는 굉장히 중앙집권화되어 있거나, 굉장히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굉장히 중앙집권화되어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효율적인 독재 정부를 의미하고, 굉장히 다원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혼란스러운 사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부르는데, 혼란이나 독재의 형태로 소수만 부유해지고, 그 부를 이용해 소수가 또다시 정치권력을 사게 되니, 결국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수에 의한, 소수만을 위한 사회가 되거나, 통용되는 질서가 없는 사회가 되니, 어느 정도의 성장은 가능할지라도, 사실상 열심히와는 관련이 없는 사회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보면 결론은 간단하다. 부유한 나라가 되고 싶다면, 포용적 제도를 가지면 된다. 하지만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는 순환 관계에 있고, 착취적 제도의 경우 지배하는 소수에게는 제도를 변화시킬 유인이 없기 때문에, 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바뀐 사례가 존재하긴 한다. 흑사병과 같은 결정적인 분기점이 나타나는 경우인데, 기존 제도와 이 분기점의 상호작용으로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 이후, 그 변화가 점점 확고해지면서 큰 차이가 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서유럽과 동유럽을 들어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같은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의 예시부터, 제도가 변화한 예시까지 이 책에서는 다양한 역사적 예시를 들며 불평등의 원인으로의 제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대중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포용적 제도는 번영과 성장을 부르고, 대중에게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착취적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된 지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남한과 북한을 이야기할 때, 남한이 북한에 비해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의문이 들었다.

먼저 첫 번째는 이 책이 두 제도의 경계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학문에서 편의상 정치, 경제 제도를 공부하기 위해, 그 형태를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세상은 그렇게 명확한 경계가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쉬운 예시로, 북한을 대표적인 공산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의 원래 의미처럼 북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소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다. 사실상 북한의 지도층은 엄청난 부를 독점하고 있으며, 북한에는 엄연히 암시장이라는 시장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북한에 사유재산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해도 그렇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미국의 민주주의가 같은 형태인지 생각해본다면, 분명하게 다른 지점들이 많이 있다. 이는 사회적,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데,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결국 이 세계에서 제도, 사실상 국가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포용적 제도의 전형 또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 나라마다 적합한 제도는 다르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포용적 제도라는 말로 간단히 묶기에는 그 형태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이론은 역사적 예시들을 들었기에 납득 가능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너무 결과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지점은 구조의 차원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학기 교양 수업에서 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말 것.” 개인이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으로 문제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말씀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는 말이고,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조는, 제도에 문화적관습적 의문을 합친 것을 의미하는,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단어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긴 하지만, 둘 모두 개인의 삶에 있어 경계나 틀을 제공한다는 지점에서는, 굉장한 공통점을 가진다. 문제는 제도보다 구조가 더 큰 차원에서 개인의 인센티브를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제도가 아무리 포용적이라고 한들, 사람은 여전히 문화나 관습의 범위 아래에서 살고 있고, 사실상 제도 이전에 문화나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그 문화나 관습에 대한 의문도 분명히 포함해 고려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서 학위를 받거나, 대학에 가지 않거나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다룰 질문이다. 하지만 학위가 없으면 그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회여서, 다른 선택권이 없다면, 그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인 것이다. 이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제도적 해결은 아마도 학위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간 구조적 해결은 학위가 이야기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일 것이다. 결국 구조적 측면에서 본다면, 제도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 또한 제한적이다.

그래도 다행인 지점은 제도나 구조가 변화 가능하다는 점이다. 제도나 구조와 같은 틀은 사람이, 더 잘 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비록 확고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다. 문제는 바꿀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변화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다는 사실인데, 그렇기에 이러한 변화는 아래로부터 시작되고는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와 같은 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다른 상황에서 의견을 관철시키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이 달라서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면, 동등하지 않은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면 된다. 이 경우, 아마도 이 의견 제시 방법은 여러 가지 단어로 매도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제도이든, 구조이든 우리를 더 잘 살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아마도 실패하지 않는 국가와 맥을 같이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