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물수능이면 안 되는 이유

 

몇 년 동안 쉬운 수능의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올해 수능은 누가 봐도 매우 심한 물수능이었다. 수리B형에서는 응시자의 4% 이상이 만점을 받았고, 따라서 이과 학생들은 한 문제만 틀려도 수리 영역에서 2등급을 받았다. 다른 언어나 영어 과목도 변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쉬운 문제 난이도 때문에 수능 점수 1,2점 차이에 의해 또는 똑같은 점수를 받고서도 어느 대학의 어느 과를 지원하느냐에 따라 대학 합격 당락이 좌우되는 정도가 심해졌다.

 

매번 적절한 난이도의 문제를 출제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학생들의 공부 부담과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정부와 교육부의 방침 하에 근래 의도적으로 수능 문제가 쉽게 출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부의 말대로 수능이 쉽게 출제되어 우리나라 학생들의 공부 부담과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이 줄었다면 쉬운 수능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비효율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꽤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기사들을 보면, 여전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학업에 찌들어 있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드는 1인당 사교육비는 평균 3억 원 이상으로 별로 줄지 않았다고 한다. 여전히 학벌과 학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풍토와 그로 인한 입시위주의 교육, 공교육의 붕괴와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등급을 매기는 줄 세우기식 상대평가 등 커다란 사회 구조와 교육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능 난이도만으로 학생들의 학업 부담과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처럼 쉬운 수능으로 정부가 의도한 효과는 매우 미미한 반면, 쉬운 수능으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비효율과 비용은 매우 크다. 먼저, 쉬운 수능은 엄청난 재수생과 반수생을 양산한다. 문제가 쉬울수록 변별력이 없고, 학생의 평소 실력과 노력에 상관없이 단 한 문제를 더 맞히고 덜 맞히는 것에 따라 대학이 바뀌고, 합격/불합격이 나뉜다. 입시결과에 쉽게 승복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능이 쉬우면 그만큼 수능을 만만하게 여기고 다시 수능에 도전하는 반수생도 늘어난다. 재수나 반수를 하면 명시적 비용만 거의 대학 등록금만큼 들 뿐 아니라 가장 꽃다운 나이에 학원이나 독서실에 틀어박혀 교과서나 EBS교재 위주의 입시 공부만 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나 일을 포기해야 하는 암묵적 비용도 크게 든다. 또한 시험 문제가 쉬울수록 교과서 위주의 주입식 교육만으로 모자라 쉬운 문제만 반복해서 풀고 실수하지 않기 연습이라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공부만 왕창 하게 된다. 수능 제도가 상대평가인 이상 아무리 문제를 쉽게 내도 1등급과 9등급까지 순위가 매겨져야 하므로, 수능이 쉬워도 학생들의 학업 부담은 줄어들지 않고 쓸데없는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만 늘어나는 셈이다. 지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할 수 있는 나이에 수많은 학생들이, 특히 상위권 학생들이, 쉽고 수동적인 공부만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수능이 변별력이 없으면 학생들을 판단할 마땅한 기준이 부족한 대학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학생을 뽑기 위해 자신들 나름의 여러 가지 시험 전형을 만들어내고, 이 때문에 매해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입시 전쟁이 치러진다. 매번 새로운 입시 전형을 만드는 대학들은 대학대로, 그 수많은 전형을 공부하고 수능 이외에 논술, 내신, 여러 가지 스펙에도 신경 써야 하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많은 비용이 든다. 객관식으로만 이루어진 수능 대신 다양한 입시 전형을 통해 다양한 인재들을 확보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스펙 쌓기가 또 하나의 입시 위주의 사교육으로 이어지고, 아직 성숙한 입학사정관제가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대안 없이 그나마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수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효율성 측면뿐만 아니라 공정함과 형평성 측면에서도 물수능은 많은 문제가 있다. 수능이 쉬울수록 수능 점수는 학생들의 노력과 실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수능 보는 날의 컨디션이나 어느 대학과 과에 지원하느냐 등 운에 의해 입시 결과가 좌우되는 부분이 크다. 객관식으로만 이루어진 수능은 학생들의 잠재력과 창의력, 그 외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이는 모든 시험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어떤 종류의 시험도 한 사람의 모든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기란 어렵다), 적어도 난이도가 적절하다면 그 학생의 노력과 공부량 정도는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수능이 쉬우면 이러한 순기능조차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큰 점수 차이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니 공정하지가 않다.

 

수능이 쉬우면 사교육을 많이 받지 않고 혼자 공부해도 수능을 잘 볼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따라서 가난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져 계층간 이동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쉬운 수능이 오히려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수능이 쉬우면 작은 실수 하나로도 입시 결과가 크게 바뀌기 때문에 재수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 때 재수비용이 만만치 않다. 가난한 학생일수록 입시결과가 불만족스럽게 나와도 재수를 하기 어렵고, 한 번 더 수능에 도전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또한 수능이 쉽고 그에 따라 다른 입시 전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입시 전형에 대한 정보와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데, 이 때 돈과 엄마의 정보력이 있는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훨씬 유리하다. 수능의 마지막 영역은 원서 영역이라고 할 만큼 원서를 쓸 때 엄청난 눈치싸움이 벌어지는데, 수능이 쉬울수록 이 눈치싸움은 심해지고 이 때도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 가난하고 지방에 살수록 이런 정보를 접하기 힘들고, 이러한 정보격차는 결과적으로 빈부격차나 지역 격차를 더 심화시킨다. 수능이 쉬울수록 자신이 받은 점수로 어느 대학에 지원해야 합격권에 드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불분명해지는데, 정시에서 단 3군데에만 지원할 수 있는 현 입시제도하에서, 집안이 가난하여 재수할 엄두도 못 내는 학생들은 어떻게든 재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이 받은 수능 성적보다 한 없이 대학을 낮춰서 지원할 수 밖에 없다.

 

설령, 수능이 쉬워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학생들이 늘어난다 해도, 요즘 같이 창의력과 지식이 중시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 혼자 EBS 교재 달달 외우고 공부하면 우리나라의 소위 명문대라는 간판을 딸 수는 있어도, 이런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인재와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 정말로 교육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사회 계층간 이동을 활발히 하고 싶다면 공교육을 살리거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지, 단순히 EBS 교재를 연계시켜 수능을 쉽게 내는 것은 게으르고 무능한 정부와 교육부의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물론, 변별력 있는 수능이 우리나라 교육 제도와 입시제도 문제점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꾸거나, 수능을 여러 번 볼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수능을 폐지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등 매우 급진적인 입시제도 개혁과 전면적인 교육제도의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하루아침에 무턱대고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개혁이 있기 전까지 이 수능제도가 유지될 터이고, 그 때까지 만이라도 더 변별력 있는 문제를 출제하여 물수능으로 인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받는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최근, 2년 연속 발생한 수능 문제 오류와 난이도 조절 실패 등을 보고 기존 수능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수능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구성원은 대학교수 6명과 고등학교 교사 1명이란다. 정부가 정말 수능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들보다는 재수나 삼수를 해 본 수험생들이 현 수능과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부가 정말 수능을 개선할 의지가 있다면 왜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가장 눈이 밝은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수능개선위원회의 구성원에 넣거나 적어도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가? 얼마 전, 유웨이중앙교육이 올해 수험생 12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0% 이상이 물수능에 반대했다고 한다. 정부와 교육부, 수능개선위원회가 아무리 무능력해도 이 말 정도는 귀 기울여 들어주길 바란다.